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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러시아 견제용 EU 차관 둘러싸고 공방 격화

국방 사안에서만큼은 초당적 합의를 유지해 온 폴란드의 전통이 흔들리며, 그 자리를 치열한 권력 투쟁이 대신하고 있다.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수십억 유로 규모의 EU 군사 차관 도입을 추진하는 정부 계획에 정면으로 맞서면서다. 국경 바로 너머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위기 속에서도, 이번 충돌은 국가 주권과 부채 문제, 그리고 국방력 강화의 공적을 누가 차지할지를 둘러싼 폴란드 내부의 깊은 균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2026년 3월 10일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이 바르샤바 대통령궁에서 칼 구스타프 스웨던 국왕을 맞이하고 있다. [야네크 스카르진스키/AFP]
2026년 3월 10일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이 바르샤바 대통령궁에서 칼 구스타프 스웨던 국왕을 맞이하고 있다. [야네크 스카르진스키/AFP]

AFP/글로벌 워치 |

대규모 EU 무기자금 차관을 둘러싼 갈등이 폴란드의 친유럽 성향 정부와 민족주의 성향 대통령 간 전면 대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수십억 유로 규모의 군비 증강 계획을 둘러싼 이번 충돌은 전례 없는 일이다. 폴란드는 통상 국방 문제에서만큼은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왔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웃 국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이 계속되고 국경 너머 러시아·벨라루스와 대치 중인 최전선 국가 폴란드는 국방 예산을 GDP의 4.8%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NATO 회원국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폴란드 정부는 무기 공동조달 대출 지원 프로그램 ‘유럽안보지원행동(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 집행 법안을 통해 확보하게 될 약 437억 유로(약 75조 8,780억 원) 규모의 유럽 자금 대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이를 자국 외교의 주요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총 1500억 유로(약 260조 4,510억 원) 규모의 재원 가운데 약 3분의 1이 바르샤바에 배정될 전망이다.

2024년 11월 13일 폴란드 북부 레지코보에 위치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미사일 방어 체계의 레이더·통제 시설 건물이 보이고 있다. [마테우시 슬로드코프스키/AFP]
2024년 11월 13일 폴란드 북부 레지코보에 위치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미사일 방어 체계의 레이더·통제 시설 건물이 보이고 있다. [마테우시 슬로드코프스키/AFP]

미래 세대에 전가될 부채

해당 법안은 의회를 통과했으나, 지난 3월 12일 민족주의 성향의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제동을 걸었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이번 차관 도입이 자금 할당 방식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브뤼셀이 바르샤바에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SAFE 차관이 폴란드에 “세대를 잇는 부채”의 굴레를 씌울 수 있다고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SAFE 0%'를 제시했다.

중앙은행 자금을 대신 활용한다면 폴란드가 차관이나 이자 상환 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통령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방안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나브로츠키 대통령의 숨은 의도에 주목하고 있다.

폴란드의 자유주의 성향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Gazeta Wyborcza)는 지난 수요일, “NATO의 동부 전선 국가 중 유럽 기금 수용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나라는 폴란드가 유일하다”고 꼬집었다. 이 신문은 이번 사태를 대통령과 가까운 전임 법과정의당(PiS) 정부가 부채질한 “추잡한 정치적 논란”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의 지배 아래

야로스와프 쿠이시 정치학자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2027년 총선을 앞두고 투스크 총리가 해당 자금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통령은 총리가 엄청난 재정적 성과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큰 타격을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폴란드가 전체 재원의 상당 부분을 확보한 공로가 총리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다.

쿠이시 박사는 특히 방산 기업들이 "1년 안에 재분배될 막대한 자금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셰그라드 싱크탱크 인사이트의 보이치에흐 프시빌스키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최우선 목표는 투스크 정부를 무너뜨리고 2027년 정권 교체의 토대를 닦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회의주의 성향을 띤 폴란드 민족주의 야권은 스스로를 워싱턴의 긴밀하고 대체 불가능한 우군으로 자처하고 있다.

야권 인사들은 SAFE 차관 자금이 주로 유럽 내에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이러한 조건이 미국 방산기업들과 폴란드 간의 무기 계약 체결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PiS 당 대표는 이번 협정이 “폴란드를 다양한 종속 관계로 묶어두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결국 폴란드를 "독일의 발아래" 놓이게 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폴란드 여론조사센터(CBOS)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2%가 이 계획을 지지한 반면, 반대는 35%에 머물렀다.

중도 성향의 집권 연합과 불편한 동거 중인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반대 정파와 협치하기를 거부하며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거부권 기계'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그는 법안을 전면 거부하는 대신, 또 다른 법과정의당 측 인사인 중앙은행 총재와 공동으로 이른바 "주권적" 대안을 제시하며 맞섰다.

대통령이 제안한 법안에 따르면, 국방 재원은 중앙은행의 금·외환 보유고 재평가 가치를 기반으로 마련될 예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중앙은행이 수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은 "현실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투스크 총리는 나브로츠키 대통령의 제안이 "실제 재원은 마련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위원회와 관료 조직, 수십 가지 불필요한 규제만 양산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또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에 대비해 대통령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유럽 기금을 활용할 수 있는 “플랜 B”를 실행에 옮기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정부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각 부처 장관들이 SAFE 차관 협정에 서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며 강행 의지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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