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글라스노스트에서 침묵으로: 크렘린은 어떻게 러시아 언론의 통제권을 되찾았나
한때 위태로운 자유의 상징이었던 러시아 언론은 현재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권 아래에서 국가 권력의 도구이다.
![2000년 9월 20일 NTV 체널 직원들이 모스크바의 작업실에서 뉴스 방송을 준비하고있다. [알렉산더 네메노프/AFP]](/gc7/images/2025/07/02/50958-history_3-370_237.webp)
올하 체필 작성 |
사회가 개방될 때마다 진실은 나라를 변화시켜 왔다. 소련 말기, 검열받지 않은 보도의 물결은 국민들이 국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고, 결국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그 진실의 힘은 대중의 시선과 귀를 통제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체계적인 허위 정보
하버드 대학교의 사하로프 인권 프로그램의 전 책임자 타티아나 얀켈레비치에 따르면 소련이 무너진 이후에도 허위 정보 전략은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소련식 전략은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러시아 국내외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의붓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 그리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소련의 탄압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전체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해 왔다.
![2023년 4월 14일 한 직원이 모스크바에 있는 사하로프 박물관 겸 공공센터에서 상자를 옮기고 있다. [키릴 쿠드랴프체/AFP]](/gc7/images/2025/07/02/50959-history_2-370_237.webp)
사하로프를 겨냥한 켐페인은 소련의 허위 정보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80년대에는 정보 기관이 친정부 성향의 언론과 협력해 가짜 동영상과 문서들을 통해 국외에서 그의 명성을 실추시키려 했다.
안켈레비치는 글로벌 위치와의 인터뷰에서 "서신, 영상, 편지 등이 조작됐다. 모든 것이 편집되고 다른 맥락에서 짜집기되어 서방 언론에 넘겨졌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사하로프를 지지하려는 노력을 흐트러뜨리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하로프가 유배되었던 고르키(현재의 니즈니 노브고로드) 지역의 의사들은, 그를 몰래 촬영한 영상을 KGB에 넘겼다.
"이것은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체계적인 현실 왜곡이다,"라고 얀켈레비치는 말했다.
이것은 사하로프를 고립시키고, 폭넓은 인권 운동의 움직임을 억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이후 탈소련 시대의 선전 전술로 자리 잡았다.
"허위 정보는 매우 광범위했다. 소련 선전 체제의 위력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얀켈레비치는 덧붙였다.
변화의 불씨가 된 진실
1980년대 후반까지 소련 언론은 정부의 공식 입장만을 대변했다. 신문, 방송, 라디오는 모두 반대 의견을 제기할 틈도 없이 정부의 목소리만 전달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전, 소련에는 두 개의 방송 채널이 있었다. 이 두 방송사는 '농촌의 시간' 그리고 '나는 소련을 섬긴다'와 같은 졸음을 유발하는 프로그램들만 방송됐다,"고 이고르 에이드만 기자는 글로벌 워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에이드만은 '외국 대리인'으로 불리고 있는 러시아 사회학자로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숨막히는 상황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글라스노스트, 즉 검열을 완화하고 투명성을 강조한 개방 정책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젼 프로그램 ‘브즐랴드("관점")는 기존의 소련식 방송에서 벗어나 빠른 진행 형식으로 전환되었다. 한때 따분한 삽화 중심 주간지였던 ‘오고뇨크(Ogoniok)는 대담한 정치 평론과 탐사 보도를 다루기 시작했다.
에이드만은 덧붙여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검열은 느슨해졌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예리하고 생동감 있는 프로그램들이 자유롭게 제작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소련 시민들은 처음으로 자국 역사에 대한 다른 해석과 관점에 접하게 되었다.
CNN을 포함한 서방 매체들은 1991년 8월 모스크바 쿠데타 시도를 보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백악관 밖 탱크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전 세계로 중계된 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크렘린이 더 이상 내러티브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이든, 비교적 독립적이든 간에 러시아 언론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TV 저널리즘도 포함됐다,"고 에이드만은 회상했다.
진실에는 대가가 따랐다. 낡은 체제의 붕괴는 경제적 혼란과 이념의 공백,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을 불러왔다. 공산주의 엘리트들은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세력으로 교체되었다.
30년 넘게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를 연구해 온 오스트리아 정치 분석가 그레고르 라주모프스키는 "올리가르히 세력의 등장은 충격 요법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약탈적 자본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빈곤을 낳았다,"고 글로벌 위치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라주모프스키는 덧붙여, 이 세력이 소련 시절 대중이 의존하던 경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냉혹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광범위하게 퍼진 빈곤과 실직이 벼락부자가 된 새로운 엘리트 세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지적했다.
그는 "바우처 제도의 실패로 인해 소수 엘리트들이 국유 재산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많은 비판을 받고있는 소련 경제 자산의 민영화 정책을 언급한 것이다.
잘못된 정보를 믿었거나 자금이 필요했던 시민들은 자신이 보유한 소련 국영 기업의 지분을 헐값으로 신흥 올리가르히 세력에 팔아 넘겼다.
라주모프스키는 덧붙여, 이러한 민영화는 "대부분 경험도 없고, 자신들이 소유하게 된 기업을 성장시킬 의지도 없는 백만장자들과 억만장자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자유에서 독점으로
1991년 이후, TV 방송은 전쟁터가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부상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올리가르히 세력들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방송 채널들을 매입했다. 언론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가 이끄는 NTV는 독립적인 편집 방침을 유지했다. 한편 사업가이자 정치적 내부자였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운영한 ORT는 정부의 이해관계와 언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990년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언론에겐 완전한 자유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섬겼을 뿐이다,"라고 에이드만은 말했다.
전환점은 제1차 체첸 전쟁(1994–96) 중, 러시아 시민들이 폐허가 된 도시와 전사한 군인들, 그리고 시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찾아왔다. 당시에는 국영 채널들도 정부를 향해 맹백한 비판 보도를 내보냈다.
"그 당시에는 정부가 TV 방송을 통제하지 않았다. NTV와 독립 기자들은 전쟁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 했다,"고 에이드만은 설명했다.
하지만 기회의 문은 재빨리 닫혔다. 1999년 제2차 체첸 전쟁 당시, 정부는 언론인들의 전선 취재를 제한했다.
"언론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푸틴이 정권을 잡은 뒤 NTV를 신속하게 무력화한 이후에는 더욱 강도 높게 실행되었다"고 에이드만은 설명했다.
푸틴이 정권을 잡은 2000년, 언론 자유에 대한 퇴행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의 TV 방송은 정부가 독점하게 되었다. NTV는 해체되었고 구신스키와 베레조프스키는 축출 당했다. 이제 남은 주인은 단 하나, 바로 크렘린이었다,"라고 에이드만은 덧붙였다.
그 이후 표현의 자유는 거의 사라졌고, "외국 대리인"을 겨냥한 법률, 형사 기소, 그리고 언론 검열은 소련식 억압을 다시 부활 시켰다고 에이드만은 말했다.
"남아 있는 사람은 푸틴을 섬기는 자들뿐이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나라를 떠났거나 입을 닫고있는 것이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크렘린은 더 다양한 수단과 방식을 갖고 있다: 디지털 감시, 인터넷 검열, 독립 매체 금지, 그리고 소셜 플렛폼 통제 등이 그것이다.
얀켈레비치는 이러한 정부의 행태, 특히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부분을 범죄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을 잃었지만, 나는 누구도 악마화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순간, 마치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하지만 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이 없다. 이들은 범죄자들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