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갱단 폭력과 통치 공백 속 아이티 붕괴 위기 가속화
수년간 이어진 정치적 교착으로 약화된 이 카리브해 국가는 경쟁 갱단들이 세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국가 통제력을 회복할 능력마저 사실상 잃어가고 있다.
![2026년 4월 20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한 상인이 전날 밤 발생한 갱단 폭력으로 파손된 주택 옆에 한 상인이 앉아 있다. [클라렌스 시프로이/AFP]](/gc7/images/2026/06/17/56301-haiti-370_237.webp)
존 페르난도 무뇨스 |
사람들은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챙긴 채 피난길을 이어가고 있다.
포르토프랭스 외곽에서는 오토바이에 묶어 실은 매트리스와 옷가지로 가득 찬 대형 쓰레기봉투, 무장 갱단이 장악한 거리에서 여전히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아이티 수도에서는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일이 더 이상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족들이 집을 떠나는 모습은 이제 일상의 일부가 됐다.
이번 위기의 새로운 국면은 사태가 더 이상 도시 내 고립된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갱단 간 영역 다툼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무장 세력은 이제 주민들의 이동과 생계 활동, 식량 접근은 물론 누가 학교에 가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지까지 통제하고 있다.
![2026년 4월 20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시위대가 치솟는 연료 가격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서고 있다. [클라렌스 시프로이/AFP]](/gc7/images/2026/06/17/56312-africafuel-370_237.webp)
확산되는 혼란
한편 지난 수년간 이어진 정치적 교착 속에 국가 기능이 약화된 아이티는 통제력을 회복할 여력조차 점차 잃어가는 모습이다.
유엔 아이티 통합사무소(BINUH)가 5월 8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동안 최소 1,642명이 목숨을 잃고 745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 보고서는 폭력 사태가 포르토프랭스를 넘어 아르티보니트와 상트르 등지로 확산되고 있으며, 수도의 붕괴 양상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엔 사무총장 아이티 특별대표인 카를로스 루이스 마시외는 “도심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이 다소 나아졌지만, 아이티 국민 상당수에게 불안은 매일 반복되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폭력 사태는 수도를 넘어, 특히 아르티보니트와 상트르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5월 8일 보도자료에 포함된 수치는 아이티 붕괴의 심각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다른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갱단 관련 폭력으로 150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삶의 터전을 떠났고, 인도주의 단체들은 긴급 지원이 필요한 주민이 600만 명을 넘으며, 이 가운데 어린이가 3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엔 집계로는 2025년 한 해 동안 8,100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2024년보다 20% 증가한 규모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국제공항은 2024년 11월 항공기를 겨냥한 무장 공격 이후 국제 상업 항공편 운항이 중단된 상태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2025년 아이티 인권 상황 보고서는 무장 세력에 의한 살해, 납치, 성폭력, 아동 강제 동원 실태를 드러냈다. 이들 무장 세력은 지역사회를 공포에 몰아넣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소녀와 젊은 여성들이 특히 취약한 환경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아이티 아동들은 전 세계에서 강간과 성적 학대 피해율이 가장 높은 수준에 놓여 있으며, 중대한 인권 침해에도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아이티는 이 같은 피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5개국 가운데 하나이며, 중대한 인권 침해 피해 아동 대부분은 여아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갱단의 통제
갱단들은 도시 변두리에서 활동하던 범죄 조직을 넘어 포르토프랭스 상당 지역을 장악한 세력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도로를 통제하고 지역 업체들을 상대로 갈취를 일삼으며, 통행금지를 강요하는 것은 물론 지역 전반의 출입까지 사실상 통제하고 있다.
유엔은 무장 세력이 이미 아이티 수도의 최소 80%를 장악했으며, 도시 안팎으로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티의 갱단 세력 구도를 사실상 주도하는 조직화된 범죄 집단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세력은 아이티 내 주요 갱단들이 결집한 연합체인 비브 앙상므(Viv Ansanm)다. 이 연합에는 G9과 한때 적대 관계였던 일부 갱단 간의 오랜 연대도 포함돼 있다.
또 다른 강력한 무장 조직인 그랑 그리프(Gran Grif)는 아르티보니트 지역에서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낸 공격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그랑 그리프 못지않게 위협적인 범죄 집단들 역시 포르토프랭스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조직은 지역 장악을 둘러싼 세력 다툼 속에서 지역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고 지역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민간인을 겨냥한 폭력을 동원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에게 아이티의 통치력 붕괴는 정치적 문제라기보다 일상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체감된다. 갱단의 표적이 되지 않고 출근길에 나설 수 있을지, 이번 주 동네에 연료가 들어올지, 다음 주에도 학교가 문을 열지, 아플 때 병원을 찾을 수 있을지, 한밤중 총성에 잠을 깨지 않은 채 밤을 보낼 수 있을지 같은 문제들이다.
아이티의 국가 붕괴 위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자체가 또 다른 불확실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아이티에 파견된 갱단진압군(GSF)은 케냐가 주도하는 다국적 부대로, 당초 갱단 대응의 판도를 바꿀 전환점으로 기대를 모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자금난과 병력 부족, 파견 지연에 발목이 잡히면서 당초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결정적 돌파구가 되지 못했다. 유엔은 2025년 9월 아이티 당국의 도시 통제력 회복과 국가 핵심 기반시설 보호를 지원하기 위해 더 강력한 병력 창설을 승인했다.
유엔 관계자들이 지난 4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임무가 확대되면서 갱단을 상대로 한 진압 작전이 본격화됐고, 그 결과 2025년 12월부터 2026년 2월 사이 갱단 조직원 최소 1,300명이 숨졌다.
갱단 소탕 작전 확대는 민간인들에게 또 다른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범죄 조직이 활동하는 인구 밀집 지역에서 드론 공격과 치안 작전으로 일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교착 상태
분석가들과 안보 전문가들은 아이티 혼란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태가 갱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아이티는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외국 용병들에 의해 암살된 이후 수년째 정치적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암살 사건 이후 선거는 여러 차례 연기됐으며, 현재로서는 8월 30일 치러질 전망이다.
정치적 공백기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현지 당국은 권력 유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으며, 여러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는 부패 의혹을 둘러싼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부재와 정당성 결여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갱단은 과거 국가가 통제하던 영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루이스 마시외는 “치안 상황이 개선되고 폭넓은 참여와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이뤄져야 신뢰할 수 있고 널리 인정받는 선거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갱단이 수도 수도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다른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에서, 강압 없이 신뢰성 있는 선거를 치른다는 구상은 점점 더 모순적으로 보인다.
아이티 사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좌절감도 이 카리브해 국가를 덮친 붕괴 위기에 각국이 엇갈린 대응을 보이면서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카리브해 국가들 그리고 유엔은 포르토프랭스의 치안 안정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면서, 아이티의 붕괴가 역내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