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이슈

유럽의 방산 생산기지, 새 전선으로 부상

유럽은 지난 수십년 간 국방비 지출을 두고 격론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더 냉혹한 시험대는 그 돈을 얼마나 빨리 실제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지 여부다.

2026년 3월 1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촬영된 일러스트 사진 속 스마트폰 화면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OTAN) 로고가 표시돼 있다. [조너던 라/누르포토/AFP]
2026년 3월 1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촬영된 일러스트 사진 속 스마트폰 화면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OTAN) 로고가 표시돼 있다. [조너던 라/누르포토/AFP]

글로벌 워치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억지력은 단지 약속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라인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재무장 움직임 속에서 이미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포탄 재고가 부족하고 방공 요격미사일 보충이 지연되며, 드론이 생산 속도보다 더 빠르게 소모되고, 정비창이 파손 장비를 제때 전장에 복귀시키지 못한다면 군사적 공약의 실효성은 크게 약화된다.

이 같은 현실이 유럽 방위산업을 전략적 최전선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제 논점은 더 이상 유럽 각국 정부가 위협을 인식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대부분은 이미 그 위협을 직시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분산된 유럽의 방위산업 기반이 현대전이 요구하는 속도와 규모를 감당할 생산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에 있다.

나토(NATO)의 집단방위 개념을 설명한 그림. [그래픽 = 글로벌워치]
나토(NATO)의 집단방위 개념을 설명한 그림. [그래픽 = 글로벌워치]

억지력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생산능력

우크라이나 전쟁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교훈 하나를 남겼다. 비축 물량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장기전에서는 탄약과 요격미사일, 드론, 예비 부품이 빠르게 소모된다. 재고가 부족해지면 정치적 선택의 폭도 그만큼 좁아진다. 한 국가가 동맹국을 지원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충분한 생산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지원은 갈수록 지속하기 어려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방산 생산기반은 이제 억지력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 각국 정부는 국방비를 증액하고 신규 계약을 체결하는 한편, 방산업계에 생산능력 확충을 압박해 왔다. 유럽방위산업프로그램(EDIP)은 생산 역량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을 높이는 동시에 역외 공급업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마련됐다. 그러나 유럽이 직면한 과제의 무게는 여전히 막중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뢰로 작성된 유럽 경쟁력 관련 '드라기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중반부터 2023년 중반까지 전체 방위 조달 지출의 78%가 비EU 공급업체에 돌아갔으며, 이 가운데 63%는 미국에 집중됐다.

EU 방위산업 전략에 관한 유럽의회 브리핑도 같은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해당 브리핑은 이러한 문제가 분산된 수요와 국가별 조달 관행, 그리고 예산 증액을 실질적인 방위산업 생산능력 확대로 연결하지 못하는 유럽의 구조적 한계와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높은 비EU 공급업체 의존도는 유럽의 핵심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략적 포부는 분명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체 방위산업 기반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돈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방위산업 생산은 방대하게 이어진 공급망과 전문 인력, 폭발물,전자부품,추진제의 안정적 확보, 그리고 주문이 확정되기 전부터 투자에 나설 기업들에 달려 있다. 정부는 목표를 빠르게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장 건설과 인력 양성, 생산라인 인증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 역시 비슷한 압박에 직면해 있다. 지난 6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탄약 생산과 공급망 병목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했다. 해당 메모에는 고체 로켓 모터와 점화장치, 유도체계 부족을 핵심 문제로 지목했다.

유럽에 주는 교훈은 더욱 분명하다.

미국 방위산업이 유럽 자체 역량으로 메우지 못하는 부족분을 언제까지나 대신 채워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워싱턴은 여전히 나토 억지 태세의 핵심 축이다. 그러나 유럽이 소비하는 물자의 더 많은 부분을 감당할 자체 공급 역량은 갈수록 유럽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유럽을 시험대에 올린 생산 역량의 규모

전쟁 초기 단계에서는 긴급 군사 물자 이전이 전쟁의 양상을 규정했다.

다음 단계는 대체 생산 역량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이어가면서도 자국 비축분을 다시 채울 만큼 충분한 속도로 포탄과 방공 미사일, 드론, 장갑차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미 방위산업 전반을 재편하고 있다.

프랑스 자동차 업체 르노는 자동차 제조 기반을 방산 생산 확대에 활용하는 방안으로 탈레스와 배회탄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월 최대 1,000대 규모의 생산 계획은 수요가 급박한 상황에서 민간 산업이 군사적 공백을 메우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국가들도 이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각국 정부는 이중용도 생산, 더 빠른 조달 절차, 공동 구매, 장기 계약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부 동맹국은 이미 "상시 가동" 탄약 생산 역량을 갖추고 비축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방위산업계가 안심하고 생산 확대에 나설 수 있도록 충분한 수요 확실성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러나 유럽 앞에는 여전히 해묵은 난제가 놓여 있다.

국가별 조달 관행은 여전히 파편화돼 있고, 표준도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중소 방산업체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대형 업체들도 주문 감소 시 가동률이 떨어질 수 있는 생산 설비 투자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력 부족 역시 주요 제약 요인이다. 기업들은 엔지니어와 용접공, 기술자, 전자 분야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산업 전략이 국방 전략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탄약 공장과 드론 생산 시설은 화려하지 않다. 전투기나 군함처럼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장기 위기 국면에서는 군사적 약속의 실효성이 결국 이러한 생산 기반에서 판가름 난다.

전략적 함의는 분명하다.

유럽이 미국을 대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맹 안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생산 기반으로 자리 잡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는 나토의 역량을 강화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며, 예기치 못한 물자 부족 사태가 초래할 정치적 리스크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산업 생산 역량을 국력의 핵심 지표로 부각시켰다.

유럽의 생산 시설은 이제 더 이상 후방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제 그 자체가 전선의 일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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