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사안
크렘린, 청소년 마음을 겨냥한 ‘게임 전쟁’ 벌인다
러시아가 비디오 게임을 세뇌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다.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즐기는 디지털 세계에 선전과 군국주의를 은밀히 스며들게 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Roblox)에는 크렘린의 위험한 선전 서사를 미화한 게임들이 넘쳐난다. 러시아 군인을 찬양하는 콘텐츠가 대표적이다. 바르샤바, 10월 20일. [올하 헴비크/콘투르]](/gc7/images/2025/11/19/52815-img_20251020_171818-370_237.webp)
올하 헴비크 |
바르샤바 — 당신은 전쟁터에 있는 게 아니다. 소파에 앉아 헤드셋을 쓰고 컨트롤러를 쥔 채 게임 화면에 빠져 있다. 그런데 폭발음과 미션 사이 어딘가에서 이미 크렘린이 당신의 게임에 끼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게임플레이로 위장한 선전은 깃발을 흔들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스토리라인, 캐릭터 디자인, 왜곡된 역사 속으로 스며들어 오락을 조용한 설득으로 바꾼다.
좋아하는 1인칭 슈팅 게임에서 숨겨진 메시지나 왜곡된 적을 만날 거라 예상하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사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키이우에 기반을 둔 비영리단체 ‘링바 렉사(Lingva Lexa)’는 말한다. 이 단체는 전쟁범죄에 대한 오픈소스 조사와 온라인 혐오 발언 추적을 전문으로 한다.
링바 렉사는 10월 8일 「그림자 속 새로운 무기: 크렘린이 비디오 게임을 전쟁 선전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모스크바가 비디오 게임을 어떻게 문화 형성, 청소년 군사화, 디지털 세계 전역에 전쟁 서사 확산 도구로 악용하는지 상세히 밝혔다.
![온라인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Roblox)에는 크렘린의 위험한 선전 서사를 미화한 게임들이 넘쳐난다. 러시아 군인을 찬양하는 콘텐츠가 대표적이다. 바르샤바, 10월 20일. [올하 헴비크 / 콘투르]](/gc7/images/2025/11/19/52816-img_20251020_171800-370_237.webp)
크렘린의 게임들
러시아 게임 산업이 국가 선전 도구로 변모하고 있다. 정부 자금과 규제를 통해 ‘올바른’ 게임을 만들고 관객을 길들이고 있다고, 국제형사변호사이자 링바 렉사 설립자인 안나 비슈냐코바(Anna Vishnyakova)는 글로벌 워치의 자매 매체 콘투르(Kontur)에 전했다.
그녀는 크렘린 전략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때는 간단한 게임과 청소년 운동으로 시작해, 청소년기에는 급진화된 온라인 커뮤니티로 이어진다. 선전은 국가 기관과 보조금을 통한 ‘위에서 아래로’ 방식과 게임 커뮤니티·스트리밍·클랜을 통한 ‘수평적’ 방식으로 동시에 퍼진다.
조사된 게임 중에는 러시아군이 사관생도 훈련용으로 홍보하는 ‘스쿼드 22: ZOV’, 와그너 용병단을 미화하는 ‘베스트 인 헬(Best in Hell)’ 등이 있다. 도타 2, 레전드 오브 룬테라, 프리 파이어,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월드 오브 탱크 블리츠 등에서도 선전 요소가 발견됐다.
크렘린은 게임을 통해 군국주의를 일상화하고 ‘특별군사작전’ 군인을 숭배하게 만든다. 비슈냐코바는 8세부터 어린이를 모집하는 ‘청년군(Youth Army)’ 운동이 이념과 놀이를 결합한 e스포츠 대회를 열고 있다고 전했다.
스레텐스키 코사크 공동체가 설립한 ‘페레스베트’ 군사애국클럽에서는 아이들이 ‘스쿼드 22: ZOV’를 전술·협동 훈련 교보재로 사용했다.
주최 측은 “이 훈련이 지적 능력 발달에 기여할 뿐 아니라 특별군사작전 구역에서 러시아 군인이 어떻게 작전하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게임 속 공격성과 세뇌
선전가들은 청소년기 특유의 불안과 정체성 탐색 심리를 이용해,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소속감의 대가인 온라인 공간을 만든다고 비슈냐코바는 지적했다.
그녀가 예로 든 “PMC Kinder”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마인크래프트 커뮤니티로, 전투 시뮬레이션을 통해 적을 비인간화하고 군사 문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용을 조장한다.
바르샤바 제1우크라이나학교 6학년 블라디슬라프는 로블록스를 할 때마다 러시아 선전을 마주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도에서 크림반도가 빠져 있는 표지나, 아이디에 Z·O·V 문양을 단 러시아 제작 게임을 금방 알아본다고 했다.
링바 렉사 조사에 따르면 이용자들이 스스로 ‘Z 콘텐츠’를 생산한다. 아이디, 아바타, 슬로건, 밈 등으로 러시아 군인을 찬양하고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적대 서사를 퍼뜨린다. 점령지에서는 이런 게임이 지역 청소년에 대한 이념적 압박 도구로 쓰이고 있다.
비슈냐코바는 아이들이 게임을 안전한 공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숨겨진 메시지에 더 취약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정보 수집 퀘스트’로 유인하는 모바일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례도 언급했다.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과 서방 시장 격리 이후, 러시아 게임 산업은 통제된 공식 이념 채널이 됐다. 이제 게임은 ‘해방 임무’, ‘나치즘과의 투쟁’, ‘역사적 일체성’ 같은 국가 서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신작들은 크렘린이 제시한 주제와 캐릭터 지침을 따른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2030년까지 자국 스튜디오 육성에 최대 5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인터넷개발연구소(IDI)는 이미 수백억 루블을 지원했으며, 2024년에는 15억 7천만 루블(약 1940만 달러)을 2025~26년 출시 예정 게임에 배정했다.
링바 렉사는 IDI 소장 알렉세이 고레슬랍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에서 2025~2027년 동안 34억 루블(약 4200만 달러)을 추가 투자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현재 1,700~2,000억 루블(21~25억 달러) 규모인 러시아 게임 시장은 2030년 2370억 루블(29억 달러)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저항의 상징
키이우 오픈소스 정보 분석가 이고르는 콘투르에 “더 강력한 미디어·게임 리터러시 프로그램으로 게임 선전에 대응할 수 있다”며, 정부가 외교를 통해 플랫폼 책임에 대한 국제 기준을 마련하고 선전 게임 관련 데이터를 공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플랫폼 소유주와 개발사가 국가 선전과 전쟁범죄 미화를 금지하고, 정기적인 콘텐츠 관리 보고서를 공개하는 등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링바 렉사는 우크라이나 문화 저항의 상징이 된 『S.T.A.L.K.E.R. 2: Heart of Chornobyl』 같은 반대 서사를 담은 게임을 지원할 것을 권고했다.
개발사 GSC 게임 월드는 전면 침공 이후 러시아 판매를 중단하고 러시아어 현지화를 삭제했으며, 사이버 공격과 허위정보 공세를 견뎌냈다고 비슈냐코바는 전했다.
또 다른 예로, 개발 중인 전술 슈팅 게임 『Glory to the Heroes』는 전쟁을 우크라이나 시각에서 조명하며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선전 게임에 맞서는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